[건축비평] 合.求.助 2023.9
2023. 9. 15. 10:32ㆍ아티클 | Article/칼럼 | Column
Architecture Criticism Analyst, Listener, Assistor
<강남구웰에이징센터> 전경 © 배지훈
2000년도였을 것이다. <공간(SPACE)>지는 건축설계에 종사하는 1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는데, 그중 한 가지 질문이 ‘기피하는 사람이 누구냐’였다. 선두는 건축주와 공무원이었다. 의외였다. 공무원이야 감독자로 만나니 그럴 수 있다지만, 건축주는 일감을 준 사람이 아닌가. 그건 아마 고마운 존재이면서도 누구보다 깊이 관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간섭자여서가 아닐까. 천사이자 천적인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번에 리뷰하는 프로젝트의 건축주는 공무원이다.
不, 不, 不, 不 “차라리 새로 짓는 게 싸게 먹힌다.” 무엇보다 경제성이 우선되는 현실에서 집을 고쳐 쓰겠다고 할 땐 그만한 사정이 있다. 신축이 금지된 개발행위허가제한지역,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이거나 차량 접근이 어려운 장소거나, 신축하면 규모가 더 작아지거나, 유적·사적·문화재거나, “이 집은 절대 신축하지 말라”는 누군가의 유지를 유지하려거나, 길 없는 맹지거나, 불법 건물이지만 구옥 특례를 누릴 수 있다거나, 공부상 지적선과 실제 대지경계선이 다른 불합치 지역이거나, 낡은 부분만 교체하면 신축보다 싸게 먹힐 것이 확실하거나, ‘오래된 것은 모두 아름답다’란 사교적 수사를 잠언으로 오해했거나. 말하자면 신축이 不가능하거나, 신축하면 不이익이거나, 리모델링이 不가피할 때, 不득이 한다. 이 건물은 2006년에 공영주차장으로 신축되었다가 2009년에는 4, 5층에 노인치매시설을 증축했다. 이번처럼 주차장을 웰에이징센터로 개조하려고 한 적도 있었다. 공영주차장이 리모델링하기에 적합한 대상이었다기 보다, 선릉 숲이 전면에 있다는 점과 기존의 노인치매시설과의 조합을 고려했을 것이다. 그 계획이 성사되지 않은 이유는 해당 프로그램을 적용하기엔 건물 규모가 작아서였다. 이에 인근에서 대안이 될 만한 건물을 물색했으나 마땅치 않았고, 신축할 작정으로 대체부지를 찾아봤지만 이만한 접근성을 가진 장소를 구할 수 없자 원점으로 되돌아온 것으로 이곳 외엔 불가피했던 것이다.
合하는 자 리모델링을 하려고 새 건물을 짓는 사람은 없다. 공영주차장을 지으면서 노인치매시설이 위층에 들어설 것을 고려하고, 더 훗날 주차장을 개조해 웰에이징센터로 만들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처럼 건물이란 현재의 형편에 따라 지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 다른 이유로 증·개축도 하고 고장 나면 수리도 하다가, 사회적 수명이 다하거나, 물리적 성능이 저하됐거나, 적극적인 개조를 통한 활성화가 절실할 때 건축사를 찾는다. 이때 대부분 심각한 문제 한둘을 갖고 있다. 이 건물 역시 노인치매시설을 증축하면서 추가된 설비라인들이 기존 건물의 최상층 천정에 집중됨에 따라 층고가 낮던 주차장은 손을 위로 뻗으면 닿을 정도였다. 공교롭게도 그곳은 덕트 스페이스가 필수적인 공동조리실이 들어설 자리였다. 외관도 어수선했다. 주차장 외벽은 배기를 위해 사방이 오픈됐지만, 그 위층에 있던 노인시설은 주차장에서 배출된 공기를 막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이처럼 자동차와 사람, 소음과 고요, 거칠음과 애잔함, 무채색과 원색, 열림과 닫힘, 상온과 보온, 저층과 고층, 불특정인과 특정인, 편익과 거주라는 태생적 불협화음이 혼재된 건물이었다. 게다가 리모델링의 범위도 3층의 주차장 전체가 아니라 주차장을 유지하면서 일부를 새로운 시설로 개조하는 것이었기에 안정적인 외관을 구성하기 곤란했다. 그야말로 총체적인 난국. 건축주의 입장에선 리모델링을 통해 새로운 시설을 얻는 동시에 해묵은 문제들을 한 번에 해결하는 기회였을 테지만, 그 일을 맡은 건축사로선 이보다 고약한 국면이 없다.
求하는 자 “기존의 것을 최대한 이용했습니다.” 언젠가 리모델링 공모전 출품자의 설명을 들으며 ‘최대한’ 대신 ‘온전히’란 말을 썼더라면 좋았겠다 싶은 적이 있었다. ‘최대한’이란 계량적 의미 뒤엔 왠지 시혜적 감정이 서성이는 듯해서고, 답을 찾을 대상보단 무언가를 만들고 싶은 구축에 대한 의지가 앞선 듯해서다. 출품작이 신축이라면 빈 땅에 무언가를 짓는 ‘최대한’이란 선택적 판단을 해도 된다. 그에 반해 리모델링은 땅이 아니라 이미 존재했던 집을 원형질로 삼는 것이기에 ‘기존’은 선택이 아니라 자체로 받아들여야 하는 절대적 전제이다. 금 세공사에게 주어진 원석처럼. 이 건물의 설계자가 이런 숙명에 합당한 정서를 가진 사람이란 생각이 든 건 그가 사용하는 언어 때문이다. 녹색 익스펜디드 메탈을 언급할 때도 “톤은 셋이지만 거꾸로 뒤집으면 여섯 가지가 되고, 각도를 어긋나게 설치하면 더 많이 조합이 됩니다”라고 말한 것이 외벽 재료에 대한 설명의 전부였다. 여느 건축사라면 “선릉에 있는 나무들의 다채로움을 은유했다”거나 “기존 건물에서 사용된 녹색과, 숲과 집을 잇는 녹색 루트에 해당한다”고 말할 법도 한데, 그는 단지 현상을 언급하는 것에 국한했다. 기존의 주차 램프를 50미터 운동트랙으로 재사용한 것도, 경사로를 계단식으로 평평하게 만들어 관리실로 사용한 것도, 80세 이상 노인의 60퍼센트가 파란색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통계에 착안해 외부에 노란색 계통을 사용한 것도 하나같이 고심 끝에 만들어진 결과였을 텐데도, 전하는 방식은 같았다. 마치 현재의 결과들은 자신이 만들거나 의도한 것이 아니라 기존 건물이나 주변에서 채집된 것들을 이용해 ‘새로운 현실’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누군가의 내레이션을 통해 말하는 듯했다.
助하는 자 이 건물은 건축주로부터 제공된 프로그램을 설계에 반영하는 보통의 경우와 다르다. 이론을 만든 생명공학 교수와 그것을 실천하고 관리하는 공무원, 공간을 만드는 건축사가 협업해 만든 최초의 사례라고 한다. 이들은 각 분야의 전문가였으니 좋은 균형을 이룰 수도 있다. 다른 한편에서 본다면 오히려 다수이기에 책임의식이 약해지거나, 어느 둘만으론 완성을 이루지 못한다는 사실을 서로가 알고 있는 불안정한 공범관계이기도 했다. 책임지는 개인이 없는 것이니 표류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이럴 때 건축사의 역할은 ‘지휘자’가 되어 전체를 통합하는 리더가 되어야 한다고 누누이 배워왔다. 견해가 다르면 설득해야 한다는 강령과 함께. 과연 바람직할까. 리더가 있으면 리드되는 상대가 있어야 하고, 설득을 하려면 설득당하는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누군들 그 당사자가 되고 싶겠냐는 것이다. 더구나 이번처럼 전문적 개별성이 뚜렷할 땐 더 그렇다. 그럼에도 성공적으로 프로젝트를 마친 것은 “주방기구 살 때도 다 같이 다녔어요. 공간에 맞아야 하니까요”, “서로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어요. 각자가 얼마만큼 알고 있는지 알아야 하니까요”라는 발언을 탄생시킨 助력자적 마음이 아닐까. 우리가 배운 지휘자론은 실존하지 않는 강박의 산물임을 이미 알았다거나.
박현진 건축사와의 인터뷰를 마치며 참았던 질문을 했다.
“건축사들의 기피 대상 1, 2등과 성공적으로 일을 마쳤고, 그들로부터 상까지 받았는데 비결이 무엇이오? 뚝심? 신앙심? 비즈니스맨십? 아님 인간에 대한 지극한 동정심?” “진심! 호호호.”
글. 김재관 Kim, Jaekwan 무회 건축사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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